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비센푸르(Bishenpur) 전투 ===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 평야의 입구까지 도달했지만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친 제33사단은 우선 남아있는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mm 유탄포와 100 mm 캐논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심지어 반자이 돌격으로 이불 속에 [[수류탄]] 여러 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공격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고, 마침내 비센푸르 요새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의 전법, 즉 [[203고지]]의 재현이 시작됐던 것이다. 결사대가 모집되어 자살 돌격을 감행했지만 비센푸르의 방어선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자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국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긴급지원을 요청했으나, 대본영은 이런 전보로 답신했다. >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열흘간만 사용 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전투기 24대는 본격적으로 공중전 몇번 치르고나면 얼마 남지도 않을 전력에 불과하다. 이런 수준의 지원을 지원이랍시고 시간 제한까지 주면서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항공전력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다.[* 연합 공군의 질적, 수적 우세를 감안하면 저 24기를 정말 지원했단들 다시 원대에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 공군이 독소전에서 전투기 400대 전후만으로 소련 공군을 탈탈 털어먹기는 했지만, 독일 공군은 최소한 소련 공군에 비해서 질적으로는 압도했기에 가능했다. 또한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어서 소련 공군이 압도적인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제공권 싸움을 해볼 만한 수준은 되었다.[* 소련 공군의 질적인 측면은 서방 연합군이 전투기로는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를 제공전투기라고 열심히 굴렸을 만큼 참담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 에어라코브라는 독소전의 저고도 화력전이라는 전장환경에서는 매우 좋은 전투기라서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소련제 항공기는 냉정히 말해서 무전기 좋은 제로센 수준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소련의 가용 항공전력은 독일 공군의 가용 전력의 거의 20배에 달했다.] 반면 일본 항공전력은 질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연합군의 비행기는 3천 대가 넘어갔다.[* 당시 일본군의 중국-동남아 공중전력은 실로 참담한 수준이라서 이미 1940년대 후반에는 중국군에게조차 공중전력에서 압도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중국군 50만 명이 전사, 부상, 실종당한 대륙타통작전에서조차 제공권은 중국군이 쥐고 있었다.(다만, 당시 원체 중국군에 지원된 항공기 숫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수가 버마전선에 묶여 있던 지라 말 그대로 제공권만 쥐었을 뿐. 정찰이나 폭격 등의 항공지원에 배정된 소티수는 매우 적었었다.) 물론 그 이유는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항공전력을 모조리 상실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